analog pixel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대신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공감의 시대’, 공유경제와 협동산업의 윤리적 상상계로 여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도 새로운 미래 표준의 지향은 단지 자연의 즉물적 모상이 아닌, ‘예지적 내면의 형상’으로서 행동의 양식화 문제일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대신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공감의 시대’, 공유경제와 협동산업의 윤리적 상상계로 여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도 새로운 미래 표준의 지향은 단지 자연의 즉물적 모상이 아닌, ‘예지적 내면의 형상’으로서 행동의 양식화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우리의 자아는 자신을 분석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기의 훈련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시킴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 휴머니즘적 모럴의 붕괴는 어떤 근본적인 자기발견의 조건들을 다시금 해방시킨다. 포스트모더니티의 극단에서 고대 윤리학으로의 복귀를 기투하는 21세기 시대정신에 조응하는 창의성이란 곧 창발성이며, 우리의 실험은 하나의 새로운 실존적, 윤리적 상상으로서, ‘비-디자인 스타일(non-design style)’의 출현을 예고한다. 공생적 자본주의의 실현, 고령화, 기후변화, 빅데이터 활용과 강력한 인공지능의 추구, 노동과 여가의 시간소비 불균형, 다원화와 사회 양극화에 따른 인간소외 현상 등 전지구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인류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은 과거, 니체의 초인이 의미했던 무시무시한 질문, ‘인간이 탈 동물화된 동물이라면, 어떻게 탈 인간화된 인간이 사고될 수 있는가?’에 대한 백지 답안에 다름 아니다.
실존의 고대 미학적 핵심은 쾌락들의 사용 미학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불안에 대한 대답이었다. 중요한 것은 쾌락의 사용을 어떻게 의식하느냐 하는 것, 자기 실천들, 자기 자신과 관계된 행위의 형식들이다. 요약하면 실존의 미학은 고대의 윤리학이고, 그 윤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관계 속에서의 어떤 존엄한 인간성의 형성이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것은 간계들의 유희를 매개로 한 어떤 내적 노예화이다. 자기 자신의 왕(오늘날의 국가, 자본권력) 또는 자신의 간계의 노예 – 이것은 고대적 윤리학의 위대한 양자택일이다. 고대적 모럴은 모럴적 생활 영위의 통일성에서 인간의 자기 충족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통일성은 그러나 어떤 코드, 어떤 보편화될 수 있는 법칙 또는 어떤 정언적 명령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자세, 즉 모럴적 행위의 개인화로부터 생성되는 행동의 통일성이다. 의사가 어떻게 치료하고 뱃사람이 어떻게 배를 항해하고 정치가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지 관찰해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관리의 테크닉을 간파해보라! 고대에는 인간의 자기관계를 중용적 자세의 통일성, 곧 유무상생 – 인간계 덕과 자연계 기의 조화- 로 파악했다. 윤리적으로 표준적인 것은 법칙들의 내용이 아니라 법칙들에 대한 행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그 핵심에 있어서는 간계들에 대한 어떤 투쟁적 행동(스타일의 본질)이다. 환언하면, 고대적 자기관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논쟁적 행동으로서 형성되었다. 오늘날 인류는 자기 자신과 경쟁적 투쟁에 처해 있다. 그 어떠한 사악한 간계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관습(사용의 양식)이 가치를 규정한다. 고대의 윤리학은 어떤 아름다운 실천을 목표로 한다. 행동의 양식화라는 윤리적 프로그램은 삶을 스타일의 문제로 만든다. 삶은 예술 작품의 재료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일종의 자기-패션화(self-fashioning)이다. 근세적 주체와 그것의 세계 지배 프로젝트에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에서, 고대의 미학적 인간들은 실존의 화장술에 몰두했다. 댄디(멋쟁이)는 모던과 병행하는 현상이다. 이 세계에서 문화란 삶에 대한 예술의 지배를 의미한다.
“인간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한다”
이것은 하나의 위대하고 흔치 않은 예술이다! 자신의 본성이 자신의 힘과 약점에서 제공하는 그 모든 것을 조망하고, 그것을 어떤 예술적 계획에 접합시켜 개별 요소들까지 예술과 이성으로 나타나게 하여 약점까지도 커버하는 그런 사람들만이 예술을 행한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양의 제 2의 자연이 부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한 조각의 제 1의 자연이 떨어져 나간다. 이 두 가지 계기는 오랜 훈련과 일상의 노동으로 이룩된다. 한편에서는 떨어져나갈 수 없는 추함이 잠복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숭고미로 그 의미가 전환되기도 한다. 오늘날 실존의 미학이 도덕의 사라짐을 보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관계들은 종교적 근본 토대들이 점점 믿을 수 없게 되고 사적인 삶을 일반적인 법칙들에 굴복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점점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신앙이 흔들릴 때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 스타일이다. 즉 실존의 미학으로서 윤리학의 기투, 윤리적 행동은 단지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첨단에서 고대의 반복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디자인이 자본과의 밀월관계를 통해 주체의식을 상실한 타율적 시대정신의 불가피론적 알리바이를 제공했다면, 이제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대신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공감의 시대’, 공유경제와 협동산업의 윤리적 상상계로 여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도 새로운 미래 표준의 지향은 단지 자연의 즉물적 모상이 아닌, ‘예지적 내면의 형상’으로서 행동의 양식화 문제일 것이다.
解題 : 최익서 교수